내가 할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 활동을 하는 중에 [목숨의 중요성],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낀다.
NPO법인한신아와지 대지진 1.17희망의 등불(HANDS) 이사장 시라키 토시히로씨
토크1
1.17희망의 등불(HANDS)의 활동
히가시유원지에 희망의 등불을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희망의 등불을 나누는 활동을 하고 있다. 각지에 있는 위령비를 순회하는 모뉴먼트워킹, 부흥의 상징[해바라기]를 전국의 모두에게 보내는 활동 등을 하고 있다. 가장 큰 활동으로는, 1.17모임을 갖는 것. 지진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활동이다. 모뉴먼트 워킹의 경우는 99년을 시작으로 올해 4월에 60번째를 맞이한다.
아드님의 죽음, 지금의 활동
아들은 그 당시에 고베대학3학년, 21살이었다. 집은 도궤가 많이 발생한 지역인 히가시나다구의 미카게였다. 내가 거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못한 억울함. ‘왜 내 아들이었던 걸까 ?’ ‘내가 대신이었으면’이라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슬퍼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추스리기까지 4년이 걸렸다. 우연히 고베대의 위령제에 참석했다. 어떤 방송에서 고베대학 까지 걸어서 왔다는 분들과 만났다. 그 분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만남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령비의 지도를 만들었다. 내 아들과 관련된 위령비는 4곳에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곳에 위령비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을 내 다리로 직접 순회하고 싶다고 느꼈다.
워킹에 참가해서
위족분들과 만나면서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만 불행하다]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입장의 분들이 있다]라는 생각으로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의 부담이 점점 덜어져 갔다. 당시 활기를 찾았던 부인도 워킹으로 많은 분들과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몸 상태가 안 좋아져 갔다. 역시 먼저 간 아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스트레스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히가시유원지의 모뉴먼트
히가시유원지의 모뉴먼트는 2000년도에 생겼다. 그곳에 가면 부인은 [내 이름도 아이의 이름 옆에 넣어 줘]라고 늘 말해 왔다. 2003년 12월부터 고베 시 이외의 분들도 지진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위족분들로부터 문의사항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 하면 위족분들의 기분을 표현해 드릴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희망의 등불의 나눔
지진 때 어두운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등불. 2001년 완성 된 후부터는 감사의 의미로 고베에서부터 전국으로 가지고 갔다. 1.17의 모임에 참가하고 싶다, 이 등불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 라는 의견이 있다면 나누고 있다. 단체들, 특히 학교에 많이 나누고 있다. 지금의 중학생들은 지진에 대해 모르는 세대이지만, 등불을 나눔으로서 그것을 전달해 가는 것이 도구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토크2
루미나리에에 새로 생긴 전달부코너에서 매일 현장에 있었다. 지진당시의 이야기, 그 후의 활동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젊은 사람으로부터 [지진에 대해 전달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달부를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전달부의 인원을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10명의 전달부가 있으면, 지진에 대한 생각도 10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진에 대해서는 ‘살아 남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살아 남겨져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아들을 만났을 때,
[아버지, 뭐하다 이제 오셨습니까 ?]라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괴로울 것이다. 내가 할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 활동을 하는 중에 [목숨의 중요성],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낀다.
HANDS는 그 외에도 고베시민교류회나 와카야마로부터 오는 그룹도 참가하고 있다. 외국인 분들도 무상배식 등을 제공해주고 있다. 활동 후의 정리 등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가 하고 있다. 작업을 하면서 교류가 이루어진다. 최근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 주고 있다.
이 16년이 길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짧았던 것 같다. 1월 17일에는 플래쉬백처럼 순간적으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활동을 하는 것은 양 어깨에 짊어진 내 숙명이다. 모두와 함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인해 부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가벼워진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