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에 건물의 내진화를 강화해야
  • 재일 외국인과 재해
  • photo

     

    평소에 건물의 내진화를 강화해야

    카나에 부동산 카나에 미치오 씨

     

     

    ■카나에 부동산

    저는 고베 코난 라이온스 회원으로, 대지진 당시, 회원들 안부부터 확인했습니다. 헌혈 활동도 하고 있었습니다. 부동산 중개 및 관리, 임대•매매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중재나 조정을 하고 있습니다.

    ■살 곳이 없다, 매물이 없다

    피난소를 나온다해도 갈 곳이 없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문화아파트*는 대부분 붕괴했습니다. 지진 후 많이 발생했던 문제 중 하나는, (지진으로) 리폼을 한 경우 이전보다 임대료가 올랐다 등, (현실과) 법률 간의 차이였습니다. “더 싼 방을 찾고 싶다”는 요망도 많았습니다만, 매물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문화아파트: 고베를 포함하는 긴키지방에 주로1950-60년대 고도경제성장기에 지어졌던 집합주택을 문화주택의 명칭. 이전까지의 집합주택의 경우, 대부분이 화장실이나 부엌이 공용이었던 것과 달리 각 가구 별로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종래의 집합주택보다 문화적이라는 뜻. 최근에는 건물이 점점 노후해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는 많은 문화주택이 붕괴, 입주자 중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

     

    ■집을 찾아 효고현 밖으로

    고베시 안에 살던 시민이 집을 찾기 위해 효고현의 밖으로까지 이사갔습니다. 일시적으로 살고 오겠다던 것이,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집주인도 살던 집이 무너지고, 소유했던 아파트도 일부 붕괴돼,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세가 다 차버린 상황이어서 집주인인데도 살 집이 없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런 집주인께서 매물을 소개 해달라고 하기도 하셨습니다.

     

    ■집이나 회사

    고베시 나다구의 스이도스지 상점가는 폐허처럼 됐습니다. 지진 당일은, 마침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시다, 유리창에 팔을 다쳤습니다. 황급히 밖으로 뛰쳐 나가, 가까운 히에다 초등학교로 갔습니다. 자위대가 와 있었고, 살풍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재해에 대한 마음가짐

    인프라 정비 등은, 일상 속에서 점차 갖춰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진 당시, 붕괴하지 않았던 건물의 보강 등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내진화는 별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천의 지진을 보고

    집의 보강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공공 건물 (초등학교 등)은 피난소로 사용돼야 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붕괴했다는 것을 보고 비참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재일 외국인과 재해

    한국어 강사 리옥순 씨

    photo

     

     

    ■신나가타에서 지진피해를 입다

    재일 3세, 결혼을 계기로 고베에 왔습니다. 지진 당시 신나가타에 살고 있었습니다.지진 직후 집을 나와보니 붕괴된 건물들이 모두 남쪽으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가족 6명, 부상을 입었지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가까운 초등학교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해, 피난했습니다.

     

    ■잠재돼 있던 차별의식이 현저히 드러나

    피난소에서는 차별을 받았습니다.자신이 약해져 있는 때인지라 본능적인 감정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모든 모순을 재일조선인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던 소문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아이가 걱정돼 막연한 불안감이 스쳤습니다.

     

    ■민족대학에서의 만남

    고등학교 졸업까지 통칭명*을 사용했습니다. 명실공히 일본인이 되어 일본에 귀화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민족대학에서 조선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어, 함께 자기 나라의 역사, 문화, 언어 등을 배웠습니다. 그들과 허물없이 지낼 때의 안도감에 젖어들어, 점점 지식을 흡수해 나갔습니다. 그때부터는 나도 본명을 쓰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아들은 유치원 때부터 민족학교에 보냈습니다.자기 나라의 언어와 나라를 모르면,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확고히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칭명: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강요받아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해방 후에는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재일동포가 16세부터 발급받게 되는 법무성 관할의 외국인등록증에는 조선식 이름인 본명과 일본식 이름인 통명을 둘다 병기하게 되어 있다)

     

    ■재일외국인을 지원하는 활동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난소에서는 무심코 통칭명으로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피난소에서 통명을 써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져, 지금까지의 나는 진짜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라가는 상황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

    외국인이 가진 문제는 지금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지진 때는 “일본인도 힘든 상황에, 외국인 돌볼 새가 어디 있냐”라는 의식이 개인차원 뿐 아니라 행정차원에서도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사회는 일본인들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공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